영어강의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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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kills 댓글 0건 조회 5,245회 작성일 09-07-0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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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학에서 왜 영어강의를 할까? 라는 의문을 갖는 분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대학원이 아닌 학부에서 100% 영어로 강의를 하는 논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이공계 특성화대학에서는 전공과목을 영어로 강의할 필요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95년, 제가 대학에 입학에서 가장 실망했던 과목이 바로 "일반화학"이었습니다. 본고사에서 화학을 선택한만큼 고등학교 수준의 화학은 쉬운 과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보니 고등학교 화학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교과서는 영어원서를 사용했고 수업은 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수님의 설명은 영어와 국어를 섞은 이상한 문장이 되더군요.

예를 들어, "기체분자들이 일정한 부피의 상자 안에서 임의로 분포한다고 가정합시다."라고 쉬운 말로 해도 되는데, 당시 화학 교수님은 "개스몰레큘들이 일정한 볼륨의 박스 안에서 랜덤하게 분포한다고 어셤션 합시다." 이런 식으로 수업시간 내내 강의를 하셨습니다. 한 시간 내내 수업진도만 빼기에 바쁜 강의였습니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대학생활을 하는지, 화학이 왜 중요한지, 왜 우리가 화학을 원서로 배우는지, 원서 처음 읽을 때는 어떤 요령이 필요한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의였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실력이면 학점 받는데 문제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원서 읽기를 게을리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는데, 교과서에는 없는 100% 영어 문제였습니다. 이상기체 방정식을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계산 자체는 너무 쉽지요. 그런데 막상 문제가 잘 해석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확실히 느낀 점은 원서를 제대로 읽어야 시험을 잘 보겠구나였습니다.



1학년 2학기 이후로는 원서를 예습복습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3학년 때 화학을 재수강 했는데, 화학 원서가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영단어를 사용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 일반화학 번역본도 있던터라 같은 단락을 비교하면서 읽었는데, 어색한 번역 때문에 원서보다 번역본을 이해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원서에 익숙해지고 처음에는 사전이 있어야 겨우 읽던 책을 사전없이 빨리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아마 제대로 된 이공계생이라면 다들 느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포항공대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이후로 영어는 일상생활 자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과서보다는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국제학술지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중심대학의 대학원생과 교수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영어로 된 논문들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구상하고 실험을 하여 이러한 결과를 영어 논문으로 작성하여, 이를 국제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과학과 공학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입니다.

또한 국제학회에 가서 외국인들의 발표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습니다. 또한 중국과 동남아 유학생, 연구원들이 포항공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매 주 실험실 그룹미팅을 영어로 하기 시작했고, 박사 과정 중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 6개월 연수를 가게 되면서 자연히 영어 듣기와 말하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으며, 다시 3년의 박사 후 연수를 토론토대학교에서 마치고 와서 UNIST에서 일반화학을 영어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1학년 1학기부터 영어원서를 제대로 읽고, 영어 듣기/말하기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효율적으로 연구를 하고 좋은 영어실력을 갖추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영어강의에 올인할 필요는 절대 없겠지요. 그렇지만 제 영어 경험은 미래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직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앞으로 이공계에 종사하려는 학생들에게, 특히 영어권 국가 유학을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UNIST의 영어강의 시스템은 많은 도움을 줄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문제점 역시 많이 있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 인한 강의효과의 감소"를 지적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영어실력이 부족한 학생은 쉬운 강의 내용도 따라오기 벅찬 경우가 있습니다. 교수 역시 원어민이 아닌 한 100% 원하는 뉘앙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난이도의 전공과목을 소화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최고수준의 학생들이 입학하는 UNIST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교수의 역할은 고등학교 선생님처럼 학생들이 100% 이해할 수 있도록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하는 역할이 교수가 할 일입니다. 어떻게 영어강의에 임해야 하는지, 어떻게 영어원서를 읽고 시험대비를 하는지 알려준다면 나머지는 학생의 몫입니다. 특히, 이전 글에서 제가 말씀 드렸듯이 요즘 영어원서는 쉽고 풍부한 예가 있으며, 인터넷(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백과사전, 각종 포탈, 학술정보 사이트)을 통해 온갖 정보를 접하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학생들의 숨은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POSTECH이나 UNIST와 같은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영어강의를 충분히 따라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장기적으로 학생 개개인에게 영어강의 경험은 매우 큰 자산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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