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도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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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kills 댓글 0건 조회 6,716회 작성일 17-04-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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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몇 달 전에 초안을 작성한 글입니다.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 법) 시행 후 첫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사회 분위기상 언론사에 기고하기도 부적절해서 조금 더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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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 법) 때문에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된다. 학자로서 당연한 연구활동인 논문심사, 초청 강의, 세미나, 연구회의, 자문, 언론기고 등이 사전신고 대상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 요청인 경우 예외 규정이 적용되지만, 월 3회 제한 규정 때문에 자유로운 학술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순수한 학술활동이 아닌 기업체 사외이사, 특정 이익단체를 위한 곡학아세와 폴리페서 행보를 금지하는 것이 우선인데, 지극히 당연한 활동도 제약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가과제를 수행하는 민간 기관으로부터 자문회의 참석을 요청 받은 경우, 월 3회 외부강의(심사와 자문 포함)를 초과했다면 이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다(최근 본부에 확인한 바로는 부총장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면 월 3회 초과가 가능하다고 함). 물론, 일부 교수들의 과도한 외부활동을 억제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교수들에게는 불필요한 행정업무가 늘어나고 꼭 필요한 외부 활동도 줄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선물에 관한 내용이다. 각종 비리와 부정청탁이 얼마나 난무했으면 이런 법이 생겼을까 공감이 되면서도 사제 간의 정(情)까지 국가가 관여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교수는 학생으로부터 카네이션을 포함한 금전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라도 받으면 위법이다. 국민권익위도 이와 같은 법해석이 너무 했다고 생각했는지, 학생 대표가 주는 카네이션은 받아도 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음료수 하나도 받으면 안 된다. 개교초기에는 정말 많은 학생들이 진로와 전공 상담을 하러왔고, 보통 1~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학생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최소 20~30분은 그냥 지나간다. 이렇게 성심껏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어쩌다 건네받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예전에도 상담하러 온 학생들 상당수는 빈손으로 왔다) 불법으로 간주될 정도로 사회상규에 위배되는 비윤리적 행위인가? 감사한 마음에 음료수를 선물한 학생에게 특별히 학점을 올려줄 일도 없고 그 밖에 다른 혜택을 줄 이유도 없다. 학생 입장에서는 바쁜 교수에게 찾아와 장시간 상담을 하면서 맨손으로 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김영란 법 이후, 내 사무실에 방문하는 학부생이 현저하게 줄었다. 학부생들이 찾아오지 않아서 연구할 시간이 늘었다고 좋아해야 할까? 아, 장점도 있다. 이대 정유라 사건 이후로 학점을 올려달라거나 출석을 인정해 달라고 읍소하는 학생들이 많이 줄었다.



한편,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학부생-교수 관계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에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고 전수 받는 관계가 아니라, 연구공동체로서 함께 하는 시간이 가족보다 더 많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사제지간으로서 인간적인 신뢰와 학문적 존경으로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졸업을 하더라도 평생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 특히, 전공을 살려 학연기관에 취업하면 평생 OOO 교수 제자라는 것이 따라 다닌다. 지도교수가 실력이 없고 평판이 나쁘면 해당 연구실 대학원생들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고, 연구실 졸업생이 사회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도대체 OOO 교수는 뭘 가르친 거야?”라는 원망이 교수에게 날아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은 평생 학문적인 동지로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야할 운명 공동체이다. 특히,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생에게 지도교수는 초중고 선생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 인연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 출장 다녀와서 피곤한 몸으로 다시 연구실에 가서 밤늦게 대학원생의 학회 발표자료나 논문을 고쳐 주는 일이 빈번한데,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고맙고도 죄송한 마음을 담아 음료수 한 잔 드리면 그것이 부정청탁이고 금품수수인가? 지도교수가 온갖 스트레스 받아가며 외부 프로젝트 받아와서 학생들 학비/생활비 지원하고 학회 보내주는데, 학생이 학회 장소에서 소액의 기념품 구입해서 교수에게 선물하는 것도 위법한 일인가? 내가 예전에 선생님들과 교수님들께 선물을 드렸을 때 뭔가 대가를 바라고 선물을 드렸던가? 학문과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현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내게 이런 선물을 주었던 학생들을 편애하고 학점을 올려주고 특혜를 주었던가?



내가 캐나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을 때, 독일태생의 지도교수님께서는 성심성의껏 논문지도를 해주시는 분으로 유명했고, 모든 학생들이 지도교수님을 좋아했고 나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의 의미로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식 양념 불고기를 재워서 가져다 드렸다. 교수님과 사모님께서도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셨고, 레시피도 물어 보셨다. 해외학회를 보내주셨을 때도 감사의 의미로 여행지 기념품을 선물해 드렸다. 이런 것도 소위 부정청탁이고 아부인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심 없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왜 불법으로 규정하는가?



김영란 법의 취지는 백번 이해하고 지지하지만, 이런 소소한 개인적인 생활까지 통제하는 법은 동의하기 어렵다. 제발 큰 도둑부터 잡기 바란다. 방산비리, 병역비리, 온갖 부정청탁 등 사회에 만연한 비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 개인의 순수한 행위까지 비리로 몰아서 멀쩡한 사람들을 범법자로 몰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학생들이 주는 선물은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층 강화되는 연구비 감사와 공직기강 관련 공문 등 그렇지 않아도 교수들에 대한 감시가 증가하고 있는데, 여기에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사제지간이 아닌 “이해당사자”로서 법률을 적용하고, 학생들에게 교내 곳곳의 익명 신고함과 인터넷 신고 사이트를 통한 제보와 투서를 안내하는 현실이 너무나 불편하다. 무고를 당해 본 입장에서는 아무리 떳떳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선배 교수님들로부터 “학생들을 사무적으로 대해야 한다. 절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연구비에 대해 모르게 해야 한다. 여학생이 면담을 신청하면 사무실 문을 열어 두거나 두 명 이상 같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 등의 조언을 받았을 때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현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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